은혜나누기

10-12-11 15:27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77세 강원희 선교사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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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대로 30년을 묵묵히 의료선교사로 헌신하는 강원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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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벽을 문이라고 들이미시는 분이 아니야. 길을 열어주시지. 어떤 어려움 가운데 떨어뜨려 놓으시더라도 지혜를 같이 주시는 거야. 헤쳐 나갈 지혜를."

안나푸르나 새하얀 봉우리를 바라보며 백발의 의사가 차를 마시고 있다. 하얀 김이 잠시 오르는가 싶더니 그친다.

식어버린 차를 오래오래 마시며 의사는 설산을 말없이 보고 있다. 숱한 사람들이 그저 오르고 또 오른다는 봉우리. 30년 가까이 오지로 또 오지로만 다녔던 일흔일곱 의료선교사는 첫 선교지였고 여섯 번째 선교지이기도 한 네팔에서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또 다시 꿈을 꾼다. 아직 못 다 이룬 소명에 대한 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4)

# 소명이란, 무겁고 엄격한 것?

서울에 잠시 와 있던 강원희(77) 선교사를 지난달 말 안암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 기독 다큐멘터리 ''소명''의 신현원 감독이 동석했다. 강 선교사가 내년 1월 개봉할 ''소명'' 3편 ''히말라야의 슈바이처''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강 선교사는 ''소명''이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강 선교사의 삶에 대해 듣다 보면 소명이란 참으로 무겁고 엄격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흔여덟에 의료선교사로 나간 사연부터가 그렇다.

연세대 의대 재학 때부터 의료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강원도 속초에서 개업의로 일할 때도 시간 날 때마다 무의촌 진료봉사를 했다. 1970년대 당시 ''가장 못 사는 나라''의 대명사였던 방글라데시에서의 선교를 꿈꾸기도 했다.

안정된 삶 속에서 꿈은 점점 막연해져 가던 80년, 큰 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운전하던 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온 몸을 다쳤고 오른팔에는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받았다. 다음 두 번은 의료사고였다. 70대 할머니가 항생제를 주사하기 전 소량 놓는 과민반응 테스트용 약물 때문에 사망했다. "눈을 뜬 채로 뒤로 넘어가더라"고 하는 강 선교사는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한 듯했다.

그 얼마 후 피부병 약을 주사로 놓다가 약이 새서 환자의 피부가 퉁퉁 부어오른 일도 일반적으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고였다. "그제서야 ''아, 하나님께서 나를 링 위에 올려놓고 훅, 어퍼컷을 연달아 치시는구나'' 깨달았지."

그 며칠 후, 진료 중 문득 문을 바라보니 한경직 목사가 서 있었다. 순간 강 선교사는 그로부터 4년쯤 전, 속초를 방문했던 한 목사를 찾아가 "의료선교사로 방글라데시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한 목사는 "기왕 가려면 네팔로 가십시오. 네팔에서 한국 의료선교사 한 명을 꼭 필요로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했었다.

"한 목사님이 들어오시더니 ''아직도 의료선교사로 나가고 싶으십니까'' 하시기에 두 말도 않고 ''예'' 했지."

#소명이란, 하나님 계획대로 살기

결심은 했지만 주변 반대가 심했다. "믿으려면 곱게 믿지, 왜 광신도처럼 믿느냐"는 말을 숱하게 들었고 재산 빼돌리려고 도망간다는 오해도 받았다. 강 선교사에게 의사의 길을 권했던 아버지조차도 아무 말 않고 울기만 하셨다.

무엇보다도 연세대 간호대 출신으로 캠퍼스 커플로 만나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산 아내 최화순(75) 사모가 "보통사람처럼 살면 안 되나요"라고 했을 때는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어느 것도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인도하시면 사람의 계획대로 되는 게 없더라고."

그렇게 시작된 길. 네팔에서 3년 반, 방글라데시에서 4년, 스리랑카에서 4년, 다시 네팔에서 4년, 에티오피아에서 7년, 그리고 다시 올해 초 네팔로 떠나 지금까지. 정리하면 고작 한 문장이지만 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월이다.

매번 현지어를 익히기 위해 새벽까지 공부해야 했다. 물과 전기가 부족한 삶에는 이력이 났다. 그렇다고 기적처럼 전도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넌지시 전해 줄 기회조차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사비를 털어 신학 공부를 시켰던 현지인이 돈만 밝혀 마음을 다친 일도 있었다.

한창 편집 중인 ''소명'' 3편의 장면 일부를 엿보니 그 어려움이 생생히 드러난다. 무의촌을 찾아가기 위해 고지대 산길을 걷고, 지친 아내의 손을 끌어 주고, 진흙길에 바퀴가 빠진 차를 힘껏 밀고, 응급환자의 심폐소생을 위해 가슴을 내리누르는 등 장면들마다 숨을 몰아쉬는 강 선교사의 모습부터 눈에 띈다. 그렇게 숨이 차도록 힘든 일인 것이다.

#소명이란, 늘 깨어 준비하는 삶

그런가하면 별 장비도 없이 진료하는데 환자들은 눈에 띄게 호전되곤 한다. 신 감독은 "오지에서 진료하면 큰 의료기술은 필요 없겠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강 선교사님이 간단한 진찰과 문진으로 병세를 짚어내실 때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강 선교사는 전문인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물었을 때 ''실력''을 꼽았다. "자기 나라에서 당당하게 앞서가는 실력이어야 어느 나라에 가도 통하는 거야. 별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나라 가 봐야 단번에 알아들 보고 무시한다고."

때문에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첨단 의료기술을 익히기 위해 애쓴다. 이번 체류 기간에는 포항선린병원에서 한달간 숙식하며 인턴들과 근무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늘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새벽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일기를 쓴다.

#소명이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강 선교사의 얼굴에는 웃는 표정 그대로 생긴 주름이 깊이 파여 있다. 눈을 크게 뜨라는 사진기자에게 "난 웃을 때는 눈동자가 절대 안보여!" 하며 눈 위아래 주름을 더 좁힐 때면 개구쟁이 소년 같기도 하다.

"젊을 때는 불뚝불뚝하는 성질이 있었지. 선교하려면 온유해져야 해. 선교지에서는 나를 아주 예민하게 관찰하거든. 말, 표정,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본다고. ''저 사람 하는 것 보니 난 예수 안 믿을래'' 하려는 것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소명을 찾지 못했다는 사람들에게 강 선교사는 어떻게 조언할까? 답은 간단명료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그 다음은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뭘."

마지막으로 물었다. 소명은 정말 무겁고 엄격한 것일까. 강 선교사는 눈에 주름을 모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더러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했으면 불만이 생겼겠지. 그렇지만 기도 가운데 갈 때는 불평이 안 나와. 어려운 게 오히려 감사하지.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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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서영 10-12-11 22:15
    엊그제 CTS 방송을 보다 우연히 보게된 강원희 선교사님과 사모님을 여기서 또 뵙게되네요.
    쉰이 다 되어 선교를 떠나셨다고 하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시와 때와 나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으심을 알게되었어요,,, 선교지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실때면 천국같다는 사모님 말씀에 ㅠㅠ ... 정말 우리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졌었습니다. 노년의 편안함을 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먼 선교지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 지금까지도 감당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을 뵈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